과세권 제한과 제39조에서의 자유권 침해 부정은 왕권 약화에 지대한 영향을
과세권 제한과 제39조에서의 자유권 침해 부정은 왕권 약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곧 전제 군주제는 부정한다는 것으로, 이후 영국 의회의 탄생 으로 연결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대헌장이 현대적 의미의 인권선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원래 ‘카르타 (Carta)’는 영국 법제에서 특정 집단에게 국왕이 부여하는 특혜, 구체적 양허사 항을 담고 있는 문서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헌장도 이 범주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헌장은 후대의 해석에 따라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서로 각인이 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49)
2. 영국 의회의 융성
(1) 의회의 탄생
대헌장 이후 12세기 무렵에 영국의 의회는 귀족(baron)과 대주교(archbishop) 로 구성된 국왕의 자문기관(kings council)에서부터 출발하였다. 이후 의회의 역할이 커져가면서 각 지방을 대표하는 기사(knight)가 참여함으로써 하원의 역할이 추가되었다. ‘의회’라는 용어는 이러한 자문기관의 회의를 지칭하는 말로서 13세기 초부터 사용이 된다. 50) 이후 14세기경부터 각 지역을 대표하는 ‘하원’과 귀족 및 사제로 구성된 ‘귀족원’, 즉 상원으로 분리된다.
(2) 권리청원
49) 이에 대해 17세기 영국의 정치가인 에드워드 코크(Edward Coke)는 대헌장이 단순히 귀족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였는데, 그는 대헌장에서 주장하는 자유를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와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코크는 대헌장의 자유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1628년에 권리청원을 기초하였는데, 그는 성문법이 절대 우위라고 주장하면서, 국왕의 주권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50) 1295년에 에드워드 1세는 최초의 대의제적 대표기관인 모범의회(model parliament)를 소집하는데, 각 지역(county)에서 2명의 기사와 각 자치도시(borough)에서 2명의 공민 (Burgesses), 그리고 각 시(city)에서 2명의 시민으로 지역을 대표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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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제 개헌에 필요성에 관한 연구/이경준